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문단 편집) === 북베트남의 통일 정책 === 한편 북베트남은 달랐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화국 성립 직후 군사회의에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베트남을 통일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추종세력과 무기를 은닉해 두었고 COSVN(남베트남 해방사령부)를 조직하여 후일 호찌민의 후계자가 되는 레주언이 그 수장이 된다. 휴전선 형성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인민재판]]을 빙자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반대자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우선 60만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그들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의심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가톨릭 세력은 종교와 무관하게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세력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그들 또한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향에서 쫓겨난 셈[* 다만 인구 다수인 불교도랑 갈등을 빚었다든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응오딘지엠이 [[가톨릭]]을 우대하던 남베트남의 경우가 있어서인지 북베트남 여론도 가톨릭교도 추방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이었다.[* 토지개혁시기 북베트남에 있던 가톨릭들이 탄압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북베트남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금하지는 않았다. 당시 북베트남에 있던 150만명의 가톨릭교도들 중 90만명의 가톨릭교도가 북베트남에 남았다. 북베트남 정부와 호찌민은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겠다."고 가톨릭교도들 앞에서 종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 결과 가톨릭 교도들로 새로운 친정부 연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월남한 주교들을 대체할 새로운 주교들이 임명되었으며 1954년 말에는 가톨릭 사제를 양성할 신학교까지 문을 열었다. 1955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하여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정부의 포고까지 나왔다. 다만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교도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했다. 출처는 호치민 평전 p712] 그리고 사실상의 전시체제 선언인 [[1953년]] 농업 강령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집단농장화를 무리하게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56년]] 말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응에안(Nghệ An) 성(省)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 '''성을 거의 장악했다.''']가 휴전선에서 동원된 정규군 사단에게 무너지며 일단락되었다. 결국 이 2차 [[토지개혁]] 기간 중 학살된 농민의 수는 1만~5만여명으로 추정되며[* 그런데 문제는 베트남의 남북 분단 이후 숙청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한 통계가 없어서 아직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호찌민 빠와 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그렇게 많이 안 죽이고 부패한 사람들만 처벌했다, 한 쪽에서는 냅다 많이 죽였다 등등.] 북베트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한때 공산당 내부에서 호찌민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으며 호찌민 이하 공산당 간부들이 집단농장화 정책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할 정도였고 이 때문에 남베트남과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으며 미국이 총선거를 씹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 중국 같은 공산주의 대국들은 호찌민의 리더쉽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나 다행인지 풍년이 계속되었고 경제원조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체제와 경제 모두 안정권에 들어간다. 굳이 토지개혁의 성과물이라고 하자면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적 농업 방식은 이러한 막장 결과를 안겨준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어쨌거나 토지정책의 오류로 인민군이 나서야 할 정도로 심각한 농민반란까지 이어지자 프랑스와의 투쟁을 주도한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등의 기존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잠시 1선에서 물러나 남부 베트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인 [[레주언]] 등의 신진 지도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레주언은 자신들의 양보가 일시적일 거라는 북부 출신 기존 지도부의 예상을 깨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빠르게 장악한다. 남부가 기반이라 자본주의 남베트남 정권이 존속하면 지지 기반을 상실해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크게 불리해지는 사정상 새 지도부는 총력을 다해 무력통일 정책을 추진했고 협상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고 본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등의 구파를 밀어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해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되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해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명의 정부군이 200여 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